오래전 미국 동부에 제법 오래 살면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꽤 익숙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스카이라인이니 굳이 가보지 않아도 다양한 매체와 채널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서 5년 정도 살다가 다시 동부로 돌아온 2014년에 맨해튼에 나갔다가 낯선 장면을 하나 보게 되었다. 센트럴파크 남쪽에 위태해 보일 만큼 가늘고 길게 올라가고 있던 한 빌딩이었다. '파크 애비뉴 432.'

새롭게 등장한 "연필 타워"를 보도한 2015년 뉴욕타임즈의 오피니언 칼럼 속 이미지

맨해튼 최고의 전망인 센트럴파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니 입주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풍경이겠지만 주변의 빌딩들과 너무나 다른 외양을 하고 있었고, 그 높이 또한 아주 높아서(96층) 눈에 거슬렸다. '높은 빌딩 많기로 유명한 맨해튼에 높은 빌딩이 들어섰다고 불평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맨해튼이라고 해도 초고층 빌딩들이 모인 곳이 있고, 상대적으로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모인 곳이 있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조금 들어가 보면 꽤 꼼꼼한 규칙("building code")들이 적용되어 있어서 '현상(現狀, status quo)'이 유지되는 곳이 뉴욕의 맨해튼이다. 이 도시가 유난히 "사진을 잘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조화를 깨뜨린 빌딩이 등장한 거다. 나처럼 가끔 맨해튼에 나갔던 사람의 눈에 거슬렸으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불만과 항의가 쏟아졌고, 뉴욕타임즈에도 그 이야기가 실렸다. 뉴요커들의 불만은 서울 사람들이 롯데타워를 두고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2015년만 해도 그 빌딩이 앞으로 전개될 트렌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그로부터 4년 지난 후 센트럴파크 남쪽을 찍은 것이다. (영국 가디언의 기사 속 이미지다). 이 시점이면 이미 '연필 타워'는 여러 개가 완성되었거나 지어지는 중이었다.

맨해튼의 '연필 타워' 현상을 보도한 2019년 가디언의 기사 속 이미지

이렇게 가늘고 긴 빌딩이 뉴욕시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일본 도쿄에서는 뉴욕보다 일찍 '펜슬(연필) 빌딩'이 유행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땅값이 비싼 지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자투리땅에 빌딩을 짓는다는 개념은 뉴욕과 도쿄가 다르지 않지만, 일본의 경우는 빌딩이 초고층이 아니고, 대형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골목과 같은 공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늘다기보다는 얇고 앞뒤로 긴 형태가 흔한 듯하다. (물론 한때 세계 최대의 땅값을 자랑했던 홍콩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뉴욕 맨해튼의 연필 타워들은 어떤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고, 뉴욕시는 어떻게 이런 빌딩의 건축을 허가해줬을까? 아래는 2019년에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에 쓴 글이다.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연필 빌딩들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남쪽에는 흥미로운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연필처럼 가늘고 긴 빌딩들이다. 너무 높아서 하늘을 긁는다는 뜻의 마천루(skyscraper)로 유명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빌딩들처럼 좁고 높은 빌딩들은 과거에는 본 적이 없다. 어느 건축 평론가는 이 현상을 두고 로마제국이 시멘트를 사용해 돔을 만든 것이나, 19세기 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마천루처럼 한 시대의 건축을 상징할 만한 사건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왜 뉴욕에서는 21세기에 이런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짓고 있을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건축사의 흥미로운 한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 바로 근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뉴욕과 시카고의 마천루 건축사 이야기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한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한 것으로, 건물의 형태는 그 건물이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생각을 설리번이 처음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건물을 지을 때는 과거의 유명한 양식들 중 하나를 차용해서 짓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식, 고딕식, 르네상스식 등 과거 유럽의 찬란했던 건축사에서 잘 알려진 양식 중 하나를 골라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는 100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하나의 스타일이 설명서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설리번이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고, 높은 빌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마침 강철을 만드는 기술도 탄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좁은 도시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빌딩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과거 건축사의 전통적인 양식으로는 공간의 낭비가 너무 심했다. 고딕식 첨탑이나 로마식 돔은 보기는 아름다울 수 있어도 사무공간으로 사용할 수 없는 죽은 공간이었고, 르네상스식 건물 역시 지나친 장식으로 건축비 낭비가 심했다.

설리번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을 직육면체로 가득 채운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원했다. 장식이 많은 전통적인 건축만 보아왔던 사람들에게 평범한 직육면체에 가까운 괴상한 건축물을 지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리번은 건물은 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이 중요한 것이고, 거기에 충실해야 함을 설득하면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한 것이다.

허용된 공간을 가득채운 설리번의 빌딩 설계 . Wainwright Building (Saint Louis, 1891)

미국에 마천루를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소위 ‘시카고 스쿨’에 속한 건축가들이었다. 여기에는 설리번과 그의 제자이자 미국 건축의 상징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포함된다. 흔히 20세기의 뉴욕이 마천루 건축을 주도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시카고가 초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19세기에 발명된 내연 강철을 이용한 최초의 현대적인 고층빌딩도 뉴욕이 아닌 시카고에 먼저 등장했다. 빠르게 성장하던 미국 경제와 도시 부동산의 수요, 그리고 건축기술이 만난 것이다.

비록 설리번은 장식보다 기능을 강조했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건물 외벽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남아 있었고 균형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이 경쟁에 뛰어들면서 건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높은 건물이 많아지면서 도시가 보기 흉해졌다는 비판 때문에 시카고가 빌딩의 높이를 46미터로 제한한 사이, 높이 제한을 두지 않은 뉴욕에 지금 우리도 유명한 플랫아이언 빌딩(86.9m), 울워스 빌딩(241m) 등이 마구 들어서면서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도시가 마천루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좁은 도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대낮에도 길거리는 어둡고 숨이 막혀서 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은 당연히 마천루가 더 높고 많은 뉴욕시에서 심했다.

The New Equitable Building. 1910년 경 뉴욕의 모습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6년 뉴욕에서는 빌딩이 들어서는 대지를 가득 채우는 직육면체 형태의 마천루 건축을 금지하는 법이 생겨났다. ‘1916년 용도구획법’이라고 불리는 이 조치는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크게 바꿨다. 건물을 높게 짓고 싶다면 소위 셋백(setback)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건물이 위로 올라가면서 계단 형태로 점점 좁아지도록 한 것으로, 이 법의 핵심은 도시 거주민들이 하늘을 볼 수 있고, 햇볕을 쬘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1932년의 맨해튼 사진을 보면 1916년에 제정된 법이 스카이라인을 어떻게 바꿨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시카고는 그런 법을 제정하지 않았고 높이만을 제한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작고 뚱뚱해 보이는 빌딩들로 스카이라인이 만들어졌다.

셋백(setback)의 개념도
건물의 총 면적은 같아도 모양을 바꾸면 주변이 밝아진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서서 갑자기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는 연필 모양의 마천루들은 왜 등장한 걸까? 이 역시 뉴욕의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다. 뉴욕시는 1961년, 수십년 된 용도구획법을 개정하면서 FAR(floor-area-ratio), 우리식으로 말하면 ‘용적률’에 해당하는 룰을 만들었다. 대지 면적을 기준으로 건축물의 부피에 제한을 둔 것이다. 즉, 건물을 가늘고 높게 짓든, 낮고 넓게 짓든 총 부피만 맞추면 되었다.

시에서 정한 용적률을 지키기 위해서는 높은 건물은 좁아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뉴욕식 자본주의 정신이 발휘된다. 용적률에 제한을 받아서 일정 높이 이상을 지을 수 없게 된 건축주라도 주변에 건물을 더 높게 지을 수 있음에도 용적률을 모두 사용하지 않아서 공중권(air rights)이 남아도는 건물이 있다면 그 건물주에게서 공중권을 사들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주위의 낮은 빌딩에서 '공중권'을 사서 허용된 것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원래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낮은 건물을 부수고 더 높은 빌딩을 지으려는 건물주를 만류하는 대신 재산권을 보전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지만, 일단 통과된 후에는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맨해튼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의 주인들을 찾아다니며 공중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대표적인 건물이 유명한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로, 원래는 용적률 때문에 20층 이상 올릴 수 없던 것을 인근에 있는 오래된 티파니 빌딩의 공중권을 사들여서 58층의 타워가 된 것이다.

정면에 보이는 티파니 빌딩이 사용하지 않는 공중권을 사들였기 때문에 트럼프 타워(뒤에 보이는 높은 빌딩)가 지금처럼 높아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갑부들이 안전한 투자처를 찾아 부동산 가격을 높이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대도시는 러시아와 중국의 자본이 들어왔지만 투자할 빌딩이 부족했다. 그런 잉여자본이 찾은 것이 센트럴파크 남쪽에 남은 작은 땅들이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발전한 건축기술과 뉴욕 건축법의 도움으로 그렇게 작은 땅에도 초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지난 몇 년 동안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는 연필 타워들이 발생하게 된 이유다.

결국 오늘날 바뀌고 있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자본과 건축법, 그리고 건축기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19세기와 달라진 건 없다. 그저 모양만 달라졌을 뿐이다.

억만장자들의 거리(Billionaires' Row)를 설명한 글

2019. 7. 30


"One Disaster Will Change All of This."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연필 타워들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을 좁고 높은 타워들이 현대 건축기술의 힘으로 지어졌다고 자랑했는데, 정작 사람들이 입주하면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달 초에 나온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특히 충격적이었다. 억만장자들의 거리(Billionaires Row)라는 별명이 붙은 연필 타워 밀집 지역의 많은 건물들이 이미 주민들이 거주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건설 진행 현장(active construction sites)'이라는 것이다.

무려 여덟 개의 연필 타워들이 엘리베이터와 배관 설치와 관련한 시의 허가를 받지 않았고, 일곱 군데는 화재용 스프링클러와 수직형 파이프와 관련해서, 다섯 곳은 소방법 관련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뉴욕시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면 위와 같은 허가가 아직 나지 않았어도 임시 입주 허가를 내주고 있고, 비슷한 경우는 흔해서 뉴욕시에는 최소 1백 개의 빌딩들이 그렇게 허가를 받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렇게 최첨단의 좁고 위험한 초고층 빌딩의 경우 기본적인 허가를 취득하지 못한 것은 큰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이유는 이 건물이 전례가 없는 디자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화재 안전기준은 수십 년 된 법을 따르고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빌딩이 화재 시에 얼마나 안전할지 아무도 모르고, 허가를 내주는 사람들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한 예로 이런 트렌드를 시작한 건물(글 서두에 언급한 파크 애비뉴 432)의 경우 배관 문제로 인한 침수, 엘리베이터 고장, 스프링클러를 비롯한 화재 취약성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바람에 그 빌딩에 아파트를 구한 갑부들이 집을 팔고 나가는 일이 있었다. (뉴욕 양키스 출신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가수 제니퍼 로페즈 커플도 포함되어 있다).

뉴욕타임즈는 연필 타워들이 가진 잠재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투기 열풍과 뉴욕 특유의 토지관리법 때문에 빌딩들이 갈수록 더 가늘어지는 추세가 만들어진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건축기술을 통해 이런 가늘고 긴 빌딩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안전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건축법, 화재 예방법 등이 강력하기로 소문난 뉴욕시에서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기사는 시 정부가 해야 할 검사의 일부를 기업이 직접 고용한 외부 회사를 통해 할 수 있게 허용한 1970년대의 규제 완화를 이유 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는 회계감사를 기업이 지정한 회사에게 맡기는 월스트리트의 고질적인 문제와도 닮아있다. 한국도 다르지 않지만 감리, 감사를 진행하는 기업이 그 감리의 대상이 되는 기업으로부터 감리비용을 받는다면 이익충돌과 비리의 소지가 발생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몇 해 전 항공기의 연쇄 추락을 불러온 보잉 737맥스 항공기의 결함도 궁극적으로 '셀프 검증'에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대형 사고 하나면 다 바뀔 겁니다(One disaster will change all of this)." 한 전직 감리사의 말이다. 물론 보잉 737맥스의 경우는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두 번의 추락사고였지만.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에티오피아 항공 여객기 추락사고 (2019. 3. 10)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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