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휴먼은 젊은 시절에 했던 한 인터뷰에서 "나는 전 세계에서 분노한 장애인들이 들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이 '안된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왜 안 되느냐'라고 따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는 1970년대에 다른 장애인들과 힘을 합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Berkeley)에 독립생활센터(Center for Indepedent Living)를 만들어서 장애인들이 가족에 의존하거나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함께 모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장애인들만이 아니었고, 과거 뉴욕주 캠프 제네드에서 휴먼과 함께 몇 차례 여름을 보냈던 장애인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독립생활센터 (이미지 출처: Berkeleyside)

휴먼이 잠자고 있는 504조에 서명하도록 단체행동을 준비할 때 그와 함께 하기로 한 150명의 장애인이 그렇게 캘리포니아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504조에 서명하라(Sign 504)"는 운동은 미국의 여러 주요 도시에서 일어나서 연방정부 건물에서 점거 농성을 벌였지만, 28시간 안에 모두 끝났다. 주디 휴먼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만 예외였다. 물론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진보적인 성격상, 이 시위를 응원하는 시민들이 많았고, 진보시장으로 유명한 조지 모스콘(George Moscone)이 이를 지지하는 등 분위기가 긍정적이었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포함된 큰 그룹이 열흘 넘게 사무실 건물에서 나오지 않고 생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29세의 휴먼이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닥에서 잠을 잘 수 없는 분들이 몇 분이냐"며 묻는 휴먼을 보면 그보다 6년 전 여름 캠프에서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실제로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은 "우리가 캠프에서 했던 거랑 똑같았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한다.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에서 벌인 점거 농성 장면 (이미지 출처: 주디 휴먼의 트위터, The New York Times)

애초에 점거가 길어질 줄 모르고 시작한 시위라 칫솔 같은 기본적인 물품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조달해야 했고, 대외 연락과 음식을 담당할 사람도 필요했다. 휴먼은 캠프 제네드에서 했던 것처럼 팀을 만들어 담당자를 배정하며 장기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휴먼은 시위대의 편의만 꼼꼼하게 챙긴 것이 아니다. 모든 시위의 핵심은 단결에 있다. 샤워도 못 하고 불편한 몸으로 농성을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겠지만, 더 힘든 것은 얼마나 오래 시위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4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연방 정부가 대륙 반대쪽에 있는 한 도시에서 장애인들이 점거 농성을 벌인다고 해서 과연 움직일까? 이런 불안감은 시위를 포기하고 농성장을 떠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휴먼은 모든 사람에게 발언할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수화 통역사 없이는 회의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훗날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실패한 사회운동이 얼마나 많을까. 휴먼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서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있어 줄 수 있어요?"라고 사정하며 단결을 유지했다. 그의 부탁이 오죽 간절했으면 시위 참가자들은 "주디를 실망하게 할까 봐 가장 두려웠다"라고 말한다.

정부의 반응

다큐멘터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은 우리가 죽어 없어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매일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사라져 버리길 원해요." 미국의 정치인, 공무원들도 그랬을 거다. 장애인들이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조용히 숨어지냈으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4년을 도망 다녔는데, 주디 휴먼이 나타나 그들을 붙잡은 것이다.

휴먼은 시위대에게 "우리가 시위하는 이곳에서 정부를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자"고 했고, 그의 생각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의원 두 사람이 찾아와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서명을 해야 하는 당사자인 조 칼리파노(Joe Califano) 장관은 직접 오지 않고 대변인을 보내어 타협안을 제시했다. 모든 학교에 장애인 접근 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무리니, 학군마다 장애인 접근 시설을 갖춘 학교를 하나씩 지정하는 식으로 합의를 보자는 것이었다. 칼리파노 장관이 서명하지 않고 버틴 이유는 각 학군과 대학교, 심지어 병원들까지 나서서 장애인을 위한 설비 개선에 반대하는 로비를 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그 타협안에 분노했다. 소위 '분리 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과거 미국의 인종분리 정책을 장애인들에게 적용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휴먼이 장관 대변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말은 유명하다:

"당신들이 '분리 평등' 얘기를 꺼낼 때마다 미국에 사는 장애인들은 분노합니다. 그 분노는 계속될 것이고 불이 붙을 겁니다. 당신들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까지 앞으로 더 많은 점거 농성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가 장애인들을 탄압하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법이 강제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분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리 정책을 논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대변인이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아래 영상) 휴먼은 울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좀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미국 정부가 이렇게 들어주는 척하고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장애인의 목소리에 대중이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변에 있는 장애인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시설에 수용되어 있으니 별로 볼 일이 없고, 보이는 장애인들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니 세상에 장애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이유로 주디 휴먼은 장애인으로서,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그들의 존재와 권리를 큰 소리로 알리는 일을 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점거 농성을 하기 5년 전인 1972년에는 다른 장애인들과 뉴욕시 한복판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여 교통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장애인들에 의한 도로 점거 시위로는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결정한 주디 휴먼과 동료 시위대는 시위 시작 15일째 되는 날 비행기를 타고 연방 정부가 있는 워싱턴 D.C.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칼리파노 장관의 집 앞에서 밤샘 시위를 하고, 일요일에는 카터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가는 교회 앞으로 찾아가서 시위를 벌이며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수도에서 크고 작은 시위는 항상 일어난다. 모두 절박한 사람들이 벌이는 시위들이지만 대부분은 국민의 관심 밖에 있고, 국민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디 휴먼의 시위도 그런 많은 시위 중 하나였고, 언론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 시위를 보도한 곳은 ABC 방송의 샌프란시스코 지국 하나였고, 그것도 에반 화이트(Even White)라는 기자 한 사람만 이들을 열심히 취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워싱턴까지 시위대를 따라와 취재해서 자신의 방송국인 샌프란시코 ABC로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전국 ABC 방송국에서 노동쟁의로 파업이 일어났다. 전국 뉴스를 보내야 하는데 취재된 기사가 부족하게 되자 본사에서 에반 화이트가 취재한 내용을 전국 뉴스로 내보낸 것이다. 그때까지 휴먼의 시위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작은 말썽 정도로 생각하던 미국 정부는 깜짝 놀랐고, 칼리파노 장관은 조용히 504조에 서명했다.

주디 휴먼이 주도하는 시위가 시작된 지 24일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물론 휴먼의 싸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법이 강제성을 확보한 후에도 미국 사회의 저항은 이어졌고, 그로부터 3년 후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사회의 보수화를 이끌면서 예산을 핑계 삼아 504조의 효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무엇보다 504조를 강제할 수 있는 곳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직과 단체뿐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휴먼이 싸움을 멈출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게 또 10년을 싸운 후인 1990년, 미국 정부는 비로소 포괄적인 미국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을 통과, 발효한다.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곳뿐 아니라 미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휠체어 경사로, 장애인용 화장실, 엘리베이터 버튼 같은 시설이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 의사당 계단 기어오르기 (Capitol Crawl) 시위 (이미지 출처: Boundary Stones)

1970년대 캠프 제네드가 있었던 곳을 장애인들이 다시 찾는 장면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특히 감동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처럼 다큐멘터리(2020년에 만들어졌다)에 등장했던 인물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려주는 자막 장면을 보며 눈물을 참을 수 있을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이제 그들 곁으로 돌아간 주디 휴먼을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들이 평생을 바쳐 이뤄내고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우리는 다음 세대에 어떤 선물을 남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