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브라운과 O.J. 심슨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85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자주 다퉜고, 특히 O.J.의 가정 폭력은 친구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니콜은 성격이 급하고 쉽게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 때문에 1989년까지 무려 8차례나 경찰을 불렀다. (지금이라면 경찰은 둘을 격리하겠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아홉 번째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1989년 12월 31일. 두 사람의 집에 도착한 경찰은 옷이 반쯤 벗겨진 채로 심각한 폭행을 당한 채 집 밖 수풀 뒤에 숨어있는 니콜을 발견했다. 이날의 폭행 혐의에 대해 심슨은 불항쟁(no contest) 답변을 한다. 죄를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거다.

심슨 부부를 잘 아는 한 친구에 따르면 심슨은 니콜의 친구들에게 니콜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국 1992년에 이혼한다. O.J. 심슨이 한 모델과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였다. 이혼 후 니콜은 예전에 살던 (심슨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구했다. 차로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두 사람 모두 로스앤젤레스의 브렌트우드라는 동네에 살았다.

니콜은 1994년 6월 12일, 혼자 살던 그 집에서 살해당한다.

니콜 브라운이 살해당한 집 (이미지 출처: E! News)

니콜의 개가 쉬지 않고 짖고 있다는 이웃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에 따르면 니콜은 둔기에 머리를 맞은 후 칼로 여러 차례 찔렸다. 범인은 그런 공격으로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니콜의 목을 칼로 깊숙하게 그어서 목을 거의 잘라내다시피 했다. 그런데 현장에는 니콜 외에도 또 하나의 시신이 있었다. 니콜과 함께 있던 친구 론 골드먼(Ron Goldman)도 같은 범인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 역시 칼에 잔인하게 찔려 많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경찰은 두 사람이 단순 강도 살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두 시신 모두 사망한 후에 목을 깊숙이 베인 것으로 보아 범인이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럼 론 브라운은 누구고, 왜 니콜의 집에 있었을까? 두 사람은 친구였지만 만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고, 연인은 아니었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말이다. 사건 당일, 니콜의 어머니가 론이 웨이터로 일하는 식당에 갔다가 안경을 두고 나왔고, 니콜의 연락을 받은 론이 니콜 어머니의 안경을 찾아 돌려주러 니콜의 집에 간 것이다. (문제의 안경은 봉투에 든 채로 니콜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살인은 밤 10시 15분경에 일어났다. 심슨은 그 시점에 자기 집에 혼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알리바이는 약했다. 심슨은 그날 밤 11시 45분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가 부른 리무진은 10시 25분에 집 앞에 도착했다. 운전사는 벨을 계속 눌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덩치가 큰 사람이 심슨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운전사는 잠시 후 다시 벨을 눌렀고, 그제야 심슨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잠에 빠져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심슨은 예정된 대로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향한다.

그러는 사이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증거물을 발견한다. 검은 가죽장갑 한 짝과 피 묻은 발자국, 그리고 검은색 모자(비니)였다. 피해자가 니콜 브라운인 것을 알게 된 경찰은 곧바로 O.J. 심슨의 집으로 향한다. (그만큼 두 사람에 관해서 경찰이 잘 알고 있었다.) 심슨이 떠난 빈집에서 장갑의 다른 한 짝을 발견한다. 역시 피가 묻어 있었다.

심슨이 시카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LA 경찰은 연락처를 확인해 그에게 전처가 "죽었다(She is dead)"는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심슨의 첫 마디는 "누가 죽였느냐(Who killed her)?"였다. 경찰은 니콜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죽었느냐가 아니라 곧바로 누가 죽였느냐고 되물은 것이다. 그 후 경찰은 그를 LA로 소환해 조사를 마쳤고, 나흘 후 그를 니콜의 살인범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심슨은 경찰에 출두하지 않고 도망한다.

그 유명한 심슨의 도주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위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심슨의 도주와 경찰의 추격은 요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추격전이 아니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아나는 포드 브롱코 SUV를 경찰이 천천히 추격했고, 오후 5시 56분에 시작해서 7시 57분에 심슨이 자기 집에 도착해서 차량 밖으로 나와 경찰에 체포되면서 끝났다. 하지만 그 두 시간동안 미국 국민 약 1억명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심슨의 삶을 이야기한 어떤 기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니콜 브라운 살해 사건은 전자 미디어(=TV)가 미국을 하나로 묶었다가 쪼개버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온 미국 국민이 경찰의 명령에 응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에서 천천히 달려 도주하는 심슨의 차량을 TV를 통해 지켜봤고, 이는 아폴로 달착륙, 그리고 훗날 9/11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는, 그런 문화적 단일 경험(monoculture moment)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왜 심슨의 차량을 막아서지 않았을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주 차량은 심슨의 친구가 운전하고 있었고, 심슨은 옆자리에 앉아 총을 자기 머리에 대고 잡히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아직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었고, 9/11 테러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방송국에서 헬리콥터를 띄워 생중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은 용의자인) 그가 자살할 경우 일어날 일과 책임 때문에 경찰은 차를 막아 세우지 않고 추격만 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이 일어난 1994년은 로드니 킹의 폭행 사건(1991년)과 경찰의 무죄 판결에 분노해 (엉뚱하게) 한인타운이 불탔던 LA 폭동(1992년)이 기억에 생생하던 때였다. 흑인 남편이 백인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만으로도 인종 갈등이 폭발할 가능성이 아주 큰데, 하필 심슨의 도주 장소까지 로드니 킹이 폭행을 당한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였고, 심슨을 추격하던 경찰도 인종주의자 취급을 받던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였다. 게다가 O.J. 심슨은 모르는 미국인이 없는 스타였다.

경찰의 책임자는 아래와 같은 장면은 절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로드니 킹 폭행 사건. 영상은 여기에서 볼 수 있지만 잔인하니 주의하시기 바란다.

O.J. 심슨은 미식축구에서 러닝백(running back) 포지션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상대팀의 추격을 뿌리치고 필드를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렌터카 회사의 광고도 그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중에 하얀색 SUV를 타고 경찰을 따돌리며 캘리포니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심슨의 도주 생중계는 20세기 미디어의 절정이었다. 경찰차에 카메라맨이 동승해 실제 범인의 체포 장면을 보여주는 '캅스(COPS)'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었고, 시청자들이 범죄와 사고 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역 TV 방송들은 끔찍하고 잔인한 사고와 범죄 영상을 가져다 주는 독립 영상제작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영상을 사기 시작하던 시절이었고 (파파라치에 가까운 이들에 관해서는 영화 '나이트크롤러'가 잘 다루고 있다) 범인이 탄 차가 도주할 경우 카메라로 생중계하는 일이 흔한 "미디어 이벤트"가 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종 문제라는 묘한 서브텍스트(subtext)가 깔린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수퍼스타이고, 그가 전 국민이 TV 앞에 앉는 황금시간대에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는 모습은 그 어떤 경기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마침 그 시간에 1994년 NBA 결승전 5번째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농구와 추격전을 오가며 채널을 돌렸고, 방송국은 아예 추격전 화면 안에 작은 창을 열어 경기를 동시에 중계했다.)

도주하는 심슨의 차량과 팻말을 써들고 나와서 심슨을 응원하는 LA 시민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TV로 지켜보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지만, 이건 엄연히 살인 사건을 두고 벌어진 일이다. 2시간의 추격전은 심슨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본격적인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믿기 힘든 경찰

체포된 O.J. 심슨은 자기는 니콜의 살인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이 보기에는 심슨이 명백한 범인이었다. 일단 전처 니콜을 폭행한 긴 전력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그의 알리바이도 증명이 힘들었다. 니콜의 집과의 거리를 보면 그가 니콜과 골드먼을 살해한 후 집으로 가서 씻고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게다가 검은 가죽장갑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 한 짝에서는 니콜과 골드먼, 심슨의 혈흔이 모두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짝은 심슨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그 장갑에서도 똑같이 세 명의 혈흔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물인 모자에서 발견된 머리카락도 심슨의 것이라는 게 FBI의 분석 결과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심슨의 집 안에서 발견된 양말에서는 니콜의 혈흔이 있었고, 심슨 집 차고 앞에서도 핏자국이 발견되었고, 현장에 찍힌 피 묻은 발자국은 심슨이 당시 신던 신발과 똑같은 패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건 전에 칼을 구입했는데, 그가 구입한 칼은 시신에서 발견된 상처를 본 검시관이 예측한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증거들이 있는데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심슨은 어떻게 무죄 판결을 받았을까?

심슨은 화려한 변호인단을 꾸렸다. 여러 변호사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사람은 조니 코크런(Johnnie Cochran Jr.)이다. 코크런은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고, 일반 사건을 맡으면서도 뛰어난 변호 실력으로 상대를 떨게 했다. 평생 션 콤즈(Sean Combs),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스눕독(Snoop Dogg) 같은 유명인들, 특히 흑인 연예인들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국인들은 2005년에 세상을 떠난 코크런을 "O.J. 심슨을 무죄로 만든 변호사"로 기억한다. 누가 보기에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비결은? 이 사건을 두 명이 살해된 살인 사건이 아닌, 인종 문제로 만든 것이다. 심슨은 자기가 경찰의 음모와 증거 조작의 희생양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미국 내 흑인의 90%가 심슨은 무죄라고 믿었다. 증거는 완벽했지만, 백인은 죄 없는 흑인을 잡아넣을 때 증거를 조작해 온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크런은 이런 역사를 완벽하게 활용했다.

맨 오른쪽부터 조니 코크런, O.J. 심슨, 로버트 카다시언 (이미지 출처: Los Angeles Times)

마지막 편 'Running black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