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가 놓은 덫 ②
• 댓글 1개 보기카멀라 해리스의 트롤링 과정을 이야기하는 조너선 스완은 트럼프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2015년부터 트럼프를 취재해 왔는데, 그 사람은 심리적으로 복잡한 사람이 아닙니다. 트럼프를 2분만 관찰해도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청중의 숫자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런 트럼프가 (해리스가 던진) 미끼를 덥썩 문 겁니다."
이 대목에서 논의되고 있던 건 이민 문제, 즉 미국의 국경 이슈였다. 트럼프는 자기가 왜 민주당과 공화당의 일부가 합의한 이민법 개정안을 막았는지를 설명해서 방어하고, 바이든과 해리스가 가장 취약한 이 문제로 적극적인 공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이야기를 하던 해리스가 던진 미끼에 트리거가 되면서 모든 계획을 팽개치고 청중의 사이즈에 집중한다. "내 선거 유세에서 사람들이 일찍 자리를 뜬다고 했는데요, 사람들은 해리스 선거 유세에 가지도 않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해리스는 현재 트럼프보다 많은 청중을 모으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트럼프가 사용한 화법이다. "내 선거 유세에서 사람들이 일찍 자리를 뜬다고 했는데요, 사람들은 해리스 선거 유세에 가지도 않습니다"라는 말은 "우리 집이 작다고? 너희 집은 가난하잖아!"라는 식의 유치원생 수준의 논리다. 트럼프는 쉽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가 유치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가 청중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사고 방식이 그럴 뿐이다.
스완 기자는 해리스가 "분노한 트럼프(angry Trump)"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분노한 트럼프는 계획이나 전략이 아닌,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트럼프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온 국민, 아니 전 세계에서 지켜보는 토론회이지, 그의 지지자들이 모인 유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멀라 해리스가 말한 것처럼 트럼프는 유세장에서 온갖 희한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한니발 렉터라는 캐릭터가 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얘긴지 알지 못해도 재미있게 듣는다. 그래서 트럼프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토론회는 다르다. 언론사에서 실시간으로 팩트 체크를 하고, 반박하는 상대 후보가 있고, 무엇보다 그의 지지자가 아닌, 아직 지지할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가 듣는다. 여기에서 근거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면 안 된다. 그래서 트럼프의 참모들은 트럼프가 "유세장의 트럼프"로 변신하는 걸 막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해리스의 "청중이 지루해서 일찍 자리를 뜬다"는 말 한마디에 트럼프가 유세장의 괴물로 변했다.
무슨 말을 했을까?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에서 (이민자들이) 개를 먹어요! 고양이를 잡아먹는답니다! 그들은 그곳 주민들의 애완동물을 먹는다고요! 그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라고 외쳤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미국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던 루머였는데, 언론이 취재해서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 수많은 가짜 뉴스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그 가짜 뉴스를 대선 토론회에서 이야기한 거다. (영상 보기)
이번 토론회의 또 다른 승자는 ABC 방송국이었다. 공동 진행자 데이비드 뮤어는 트럼프의 그 발언이 나오자마자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 얘기를 하셔서 사실 관계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ABC 뉴스가 스프링필드의 관계 당국에 문의해 본 결과, 애완동물이 피해를 봤다는 신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라며 실시간 팩트 체크를 했다.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순간이었고, 수많은 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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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TV에서 봤다"라며 사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아마도 소셜 미디어에서 한 흑인 여성이 주택가에서 고양이의 사체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들어간 영상을 봤을 것이다. 이 영상은 토론회 직후에 틱톡 등에 다시 등장해 "트럼프의 말이 맞다"는 증거로 돌아다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상은 오하이오주의 캔튼에서 촬영된 것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주민(미국인)이 고양이를 먹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찍은 것이다. (출처: The Columbus Dispatch)
트럼프가 망가지는 모습에 카멀라 해리스는 그를 밀어붙이는 대신 "Talk about extreme (이런 게 극단적인 얘기죠)"이라며 웃는다. 스완 기자는 이때부터 카멀라 해리스가 토론에서 이기고 있음을 감지했다고 말한다. 해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래서 트럼프 내각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서 줄줄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며 트럼프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기회를 본 해리스의 일격
진행자는 주요 이슈인 이민 문제를 계속 파들어 간다. 특히 트럼프가 불법 이민자 1,100만 명을 국외 추방하겠다고 공약한 것을 두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체포할 거냐는 거다. 그런데 흥분해서 유세장 모드로 돌변한 트럼프는 답변을 하는 대신 이번에도 근거가 없는 얘기를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 이후로 범죄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거다.
이때 진행자가 다시 팩트 체크를 한다. "아시다시피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미국의 강력 범죄율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영상 보기)
두 번째 팩트 체크를 당한 트럼프는 또다시 자기의 강점인 이민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잊고 평소에 FBI에 쌓였던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죄 없는 자기를 수사한 FBI가 하는 발표를 어떻게 믿겠냐는, 일반적인 유권자가 믿기 힘든 논리였고, 전형적인 유세장용 멘트였다. 그런데 카멀라 해리스가 이 대목에서 준비했던 사격의 기회를 발견하고 입을 연다. "국가안보와 경제문제, 선거 개입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성폭력 범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당장 11월에 중요한 판결을 앞둔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거, 참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스완 기자는 여기에서 특유의 훌륭한 분석을 한다. 해리스가 지적한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토론 준비팀은 이런 공격이 들어왔을 때 트럼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연습을 시켰다는 것. 하지만 화가 난 트럼프는 자기가 받고 있는 수사, 재판이 전부 바이든과 해리스가 검찰에 지시한 결과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대통령이 검찰에 수사를 지시하는 것은 직권 남용으로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그런 주장을 할 때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만, 바이든의 트럼프 수사 지시설은 트럼프 외에는—심지어 공화당에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럼프는 FBI 국장을 따로 만나 충성 서약을 받으려고 시도한 사실이 국장의 회고록을 통해 밝혀졌다. 트럼프를 잘 아는 전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Nancy Pelosi)는 "트럼프는 자신의 단점, 행동을 상대방에게 투사해서 공격하는 습관이 있다. 상대가 어떻다고 말하는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가 가진 특징들이다"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런 수사 때문에 자기가 결국 유세 중에 총에 맞았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주장을 한다.
도널드 트럼프와 카멀라 해리스 사이에 합의된 토론회는 이번 한 번 뿐이다. 앞의 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트럼프는 해리스의 상승세를 저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중도층이 해리스로 고개를 돌리는 걸 막아야 한다. 그런데 이 소중한 기회를 (앵커의 팩트 체크 한 마디에 우스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근거 없는 주장에 쓰고 있는 거다. 그 바람에 카멀라 해리스는 맞으면 비틀거릴 만한 강펀치를 계속 피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거듭 날린 기회
오터레터의 '카멀라 해리스 ②'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검사로 성장한 해리스가 정치인이 되는 시점부터 미국의 정치가 크게 바뀌었고, 거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몇 차례 바꿨다. 유권자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정치인들에게 이런 변신은 변절로 보이기도 하고, 현재의 주장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정치를 오래 할수록 대통령이 되기 힘들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그거다.
토론 진행자들은 다음 질문으로 카멀라 해리스가 석유 채굴 등의 이슈에 관해서 말을 바꾼 이유를 물었다. 이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고, 트럼프가 공격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해리스는 이번에도 직접적인 답을 회피하고 자기의 가치관은 변한 적이 없다는 정치인 특유의 사운드 바이트를 짜맞춘 답을 했다.
그런데 그런 답변 중간에 또 하나의 미끼를 넣었다. 자기는 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서 "누구나 자기 아버지에게서 4억 달러(약 5,300억 원)의 사업자금을 받지도 않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파산 신청을 여섯 번이나 한 사람도 없죠"라는 말을 한 것. 트럼프는 그 말에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서 아주 작은 액수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며 구차스러운 변명을 하느라 또 시간을 소비하고, 시청자의 관심을 해리스에게서 자기 문제로 끌어오는 실수를 저지른다. 해리스는 답변을 회피하면서 사람들이 트럼프의 과거를 보게 하는 데 거듭 성공했고, 트럼프는 민주당 후보가 바이든에서 해리스로 바뀐 것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으며 효과가 떨어지는 공격에 시간을 소비했다.
말을 바꾸는 것으로 질문을 받은 건 해리스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2016년에 당선되기 전부터 "오바마 케어"를 없애고 더 좋은 보험제도를 만들겠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폐지 자체가 목적이다) 임기 내내 실현하지 못한 것을 두고 질문을 받았다. 진행자가 "처음 주장한 지 9년이 지났는데 개선안이 있느냐"고 묻자, "대략적인 계획(concepts of a plan)은 있다"고 답해서 고양이를 잡아먹는 외국인과 함께 밈이 되었다.
토론 후반부에는 트럼프가 "해리스는 그동안 인도인이라고 주장하다가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흑인이 되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도마 위에 올랐다. 트럼프는 이 질문에 과거와 똑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동안 이 문제로 질문을 받으면 "트럼프의 낡은 수법"이라며 자기의 인종이 선거의 쟁점이 되는 것을 차단해 왔던 해리스는 대응을 바꾸기로 했다. 이 이슈를 미국의 이상을 이야기할 주제로 승화하기로 한 거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부동산업을 하면서) 흑인 가정에는 세를 주지 않아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 과거 '센트럴 파크 파이브'로 지목된 흑인 용의자 십 대 아이들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신문에 전면 광고를 냈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이 미국의 첫 번째 흑인 대통령(오바마)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국인이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과 출신이 달라도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로 화합과 단결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미국이 망해간다," "불법 이민자들이 몰려온다"라는 공포를 자극하는 메시지에 집중한 트럼프와 큰 대조가 되었다.
토론회를 마치는 마지막 발언도 다르지 않았다.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 국민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자기는 검사에서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클라이언트는 항상 국민(the people)"이었다고 했다. 그럼, 트럼프는?
스완 기자에 따르면 마지막 발언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가 했어야 하는 게 "바이든=해리스"라는 것임을 기억하고 뒤늦게 그 얘기를 했지만 효과를 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이 토론회에서 "이민자들이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트럼프의 말만 기억하게 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토론회 직후 인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는 발표를 하면서 자기 고양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스위프트는 자기가 직접 살펴 보고 생각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이라며, 팬들에게도 직접 생각해 보고 결론을 내리시라는 진지한 제언을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투표하기 전에 먼저 등록하는 절차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글 마지막에는 Taylor Swift, Childless Cat Lady라고 서명해서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아이는 낳지 않고 고양이나 좋아하는 여자들"을 비판하며 한 말을 비웃기도 했다. 이제 선거일을 50여 일 앞둔 시점에 고양이가 미국 대선을 판가름하게 된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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