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에 발표된 '오징어 게임'이 발표된 후 약 3주는 넷플릭스에게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가 들어간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 엄청난 바이럴이 일어나면서 각국 언론이 이 쇼를 연일 보도하면서 훌륭한 PR이 되었고, 이는 주가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모건 프리먼이 등장하는 '더 클로저'의 예고편. 넷플릭스가 이 쇼에 얼마나 큰 기대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0월 중순이 되자 넷플릭스는 다른 이유로 언론 기사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가 장기 계약을 한 미국의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의 새로운 코미디쇼 '더 클로저(The Closer)'가 발표된 이후로 일부 직원들의 반발로 내홍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샤펠이 '더 클로저'에서 트랜스젠더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은 것을 한 트랜스젠더 직원이 비판한 것으로 시작된 이 갈등은 이 직원(테라 필드 Terra Field)이 항의하기 위해 디렉터 레벨만 모이는 경영진의 회의실에 침입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이에 놀란 회사가 이 직원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면서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회의실 침입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정직 처분은 취소되었지만, 갈등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는 중이다. CEO가 나서서 데이브 샤펠의 코미디를 두둔하며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에 반발해 다른 직원이 사내 기밀인 프로그램별 제작비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것이다. 이 정보를 본 미국의 언론은 한 시간 짜리 스탠드업 코미디에 들어간 제작비(286억 원)가 최대 히트작 '오징어 게임'의 한 시즌(9회) 제작비(254억 원)보다 많은 데 주목했고, 넷플릭스는 제작사들과의 협상에 중요한 정보를 유출한 직원을 즉각 해고했다. 항의하는 직원들은 이에 밀리지 않고 미국 시간으로 월요일에 계획 중인 작업중단(walkout)을 강행하기로 했다.

데이브 샤펠(왼쪽)의 코미디 쇼를 넷플릭스에서 내리라고 주장하는 직원 테라 필드

도대체 데이브 샤펠이 '더 클로저'에서 무슨 농담을 했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다면 이 쇼를 직접 보는 것을 추천한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반발을 불러온 코미디이지만 모든 트랜스젠더가 반발하는 것은 아니고, "이건 비하가 아니라 재미있는 코미디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각자 판단해야 할 문제다.

"That's Not Funny!"

하지만 이 갈등의 전모를 파악하려면 이전 코미디 작품들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시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Sticks & Stones'와 'Equanimity'를 권하지만, 데이브 샤펠 컬렉션을 다 보는 것도 좋다. 보다보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와 샤펠 사이의 갈등은 뿌리가 꽤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LGBTQ 커뮤니티를 소재로 한 농담을 많이 해왔고, 그중에서도 T, 즉 트랜스젠더들을 더 많이 언급했고, 그들을 상대로 더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해왔다. 물론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들 사이에서 데이브 샤펠에 대한 분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데이브 샤펠의 최신작이 '더 클로저'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난에 지친 샤펠은 자신이 트랜스젠더에 특별히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며, 자신이 쇼에서 트랜스젠더를 언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논쟁을 끝내자는 의미에서 이 쇼의 타이틀을 클로저(Closer)라고 붙이기로 했고, 한 시간짜리 이 쇼에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와의 갈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 해명의 취지를 가진 '더 클로저'가 이제까지 그가 했던 모든 쇼 중에서 가장 큰 갈등을 낳은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이게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많다. 그가 트랜스젠더 이슈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이 커뮤니티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국한된 것도, 데이브 샤펠이라는 한 명의 코미디언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소위 캔슬컬처(cancel culture)가 휩쓸고 있는 미국에서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그 직격탄을 맞았다고들 한다. 밀레니얼과 Z세대를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politically correct, PC) 않은 발언을 혐오 발언으로 규탄하면서 대학교에서 공연하던 (전통적으로 대학교 캠퍼스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순회공연이 들르는 장소다) 코미디언들이 곤욕을 치르는 일이 잦아졌고, 2015년 즈음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캠퍼스 공연을 아예 포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프래쳇 룰(Pratchett Rule)

캔슬컬처 때문에 공연을 못하겠다고 한탄하는 코미디언들은 대개 나이가 40이 넘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나이가 많을 수록 지금의 PC한 세대를 싫어한다. 아래 영상을 한 번 보라.

이들이 코미디를 보고 배웠던 20, 30년 전만 해도 코미디언이 건드리지 못하는 사회적 금기는 없었다. 아니, 10년 전에 나온 코미디도 지금은 방송되기 힘든 수준이다. 아래 글은 SNL코리아의 '20대 인턴기자'에 관해 서울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


미국인들이 사랑했던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가 최근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생전에 그가 등장했던 코미디 영상들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며 그의 유머 감각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런데 그중에 그가 뉴스앵커로 등장해 여자와 남자의 교통사고 유형 차이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가벼운 사고는 여성이, 사망 사고는 남성이 더 많이 낸다”고 말하는 그의 뒤로 통계 숫자를 보여 주는 원그래프가 등장하는데, 한눈에 봐도 각 항목의 퍼센트 숫자를 합하면 100이 넘었다. 맥도널드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숫자가 이상하죠? 여자가 계산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농담을 지금도 좋아하는 이유는 이게 1997년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똑같은 농담을 요즘 코미디언이 했다면 웃음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을 거다. 일단 “여자가 계산해서 그래프 숫자가 이상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여학생은 수학을 못한다’는 지난 세기의 선입견을 갖고 있어야 웃든, 화내든 할 텐데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은 21세기에 ‘여자는 단순한 산수도 못한다’는 얘기는 그냥 무의미한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1997년도에는 어땠을까? 여성 청중도 남성들과 똑같이 그 농담을 즐길 수 있었을까?

이 코미디가 나온 건 1997년이었다. 여성 비하적인 농담에 방청석에서 여성들이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맥도널드는 기다렸다는 듯 “화내시는 분들이 있는데, 방금 한 농담은 여성 작가가 썼습니다”라면서 “이제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모르겠죠?” 이 말에 사람들이 다같이 크게 웃자 그는 재빨리 “하하, 농담입니다. 저희는 여자 안 뽑아요.” 물론 마지막에 한 말은 농담이었고, 사람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또 한번 웃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두고 줄타기를 하면서 청중의 감정을 갖고 노는 맥도널드의 솜씨를 잘 보여 주는 예다. (중략)

여성의 수학 실력과 고용 문제를 소재로 한 맥도널드의 농담은 여성이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던 1990년대 사회(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를 ‘여성 비하적인 무례한 남성’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묘사한 것이다. 즉 그 농담을 하는 주체는 ‘미국 남성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다 이해해도 여성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회 풍자라고 해도 결국 여성들은 자신이 소재가 된 농담에서 남성들이 웃는 걸 봐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농담의 주체와 객체’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맥도널드의 농담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캐릭터가 무례한 남성 중심 사회를 상징한 것이니 여성도 웃을 수 있다는 당시 기준의 공감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이 공감대는 빠르게 변했다. 가령 미국 코미디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오피스’(The Office·2005~2013)는 상황 파악이 느리고 ‘PC한’(정치적으로 올바른) 것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 마이클 스콧이 자신이 지점장으로 일하는 사무실에서 부하 직원들과 부딪치는 일을 다루는 시트콤이다. 내용이 그렇다 보니 주인공의 온갖 부적절한 언행이 웃음거리가 된다.

핑은 마이클 스콧이 발명한 캐릭터다. 그의 캐릭터는 아시아인을 묘사하는 인종적 고정관념이었다. 그 캐릭터는 동명의 배달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던디스, 세미나, 그리고 마이클의 마지막 사무실 미팅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던 3개의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이미지 출처: https://theoffice.fandom.com/wiki/Ping

2011년에 방송된 한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작은 눈에 돌출된 이빨을 한, 20세기 중반 서양에서 많이 사용한 일본인 혹은 동양인의 분장을 하고 등장한다. 직원들은 상상도 못할 행동을 하는 상사를 애써 무시하려 하고, 그의 뒤에서는 아시아 여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본다. 이 시트콤에 출연한 인도계 미국인 여성 코미디언 민디 케일링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오피스’에 출연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요즘이라면 방영되기 힘든 장면이 많다”고 했다. 10년 만에 사회적 분위기가 그만큼 변한 것이다. (후략)

2021. 9. 28.


나이든 코미디언들의 불만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젊은 세대가 자주 인용하는 기준은 영국의 풍자 작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말이다.

“풍자는 권력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은 풍자가 아니라 괴롭힘이다. (Satire is meant to ridicule power. If you are laughing at people who are hurting, it's not satire, it's bullying).”

아주 분명해 보이는 기준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권력자를 조롱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인종과 젠더를 기준으로 보면 백인 시스젠더 남성을 풍자하거나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 것 역시 허용된다. 반면 사회적인 약자들, 즉 사회적 주류로부터 차별을 받는 성 소수자나, 장애인, 소수인종 등은 농담의 소재로 삼으면 안 된다. 물론 이 기준을 적용하면 활동을 할 수 없다며 반대할 코미디언들은 널렸다.

요즘 관객의 PC함을 가장 내놓고 공격하는 코미디언은 사실 데이브 샤펠이 아니라 빌 버(Bill Burr)다.

하지만 설령 이 기준을 적용하기로 모든 코미디언이 합의한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누가 사회적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데이브 샤펠의 문제, 혹은 억울함이 정확히 여기에 있다.

약자성: 흑인 vs. 성 소수자

데이브 샤펠은 '더 클로저'에서 자신은 흑인으로서 LGBTQ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항상 LBGTQ라고 말한다) 커뮤니티가 부럽다고 이야기한다. 흑인들은 몇 백 년 동안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여전히 차별을 받는데, 성 소수자들은 전면에 나서자마자 얼마되지 않아 바로 주류로 들어섰다는 게 샤펠의 주장이다. 그는 그 증거로 흑인 래퍼 다베이비(DaBaby)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그는 월마트에서 다른 흑인을 살해한 전력이 있는데, 그 사실은 그의 랩 가수로서의 성공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최근 공연에서 성 소수자들의 HIV/AIDS를 두고 농담을 하자 가수로서의 그의 생명이 끝나게 되었다면서 누가 더 힘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미국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운동이 수십 년 만에 큰 성과를 거둔 이유는 백인, 그것도 백인남성(게이)들이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흑인인 그가 보기에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백인들의 커뮤니티다. (흑인들은 전통적으로 커밍아웃을 꺼린다). 따라서 그들은 흑인보다 강자이고, 흑인 코미디언인 자신이 혐오가 아닌 (그는 혐오가 아님을 누차 강조한다)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항의에 동의하면서도 데이브 샤펠을 비판하는 데 망설이는 사람들은 바로 샤펠의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하지만 데이브 샤펠의 논리가 완벽하냐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사에서 인용한 2005년의 인터뷰에서 샤펠은 자신이 공연 중에 인종적인 스테레오타입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데 백인 남성이 큰 소리로 웃는 모습 때문에 "불편(uncomfortable)했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다른 인종이 흑인을 우습게 묘사한 게 아니라 흑인인 자기 자신이 한 것인데, 그것을 보고 큰 소리로 웃는 백인 남성의 모습이 자신의 코미디를 보고 웃는 게 아니라, 인종 비하적인 의미의 웃음으로 읽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자신의 코미디를 보는 트랜스젠더는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사회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조롱하면 안된다"는 '프랫쳇 룰'의 적용이 쉽지 않은 이유다. 샤펠의 논리는 프래쳇의 룰을 따르고 있는데 (흑인 < 트랜스젠더) 그 농담의 대상이 되는 집단, 혹은 개인이 그 부등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즉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위험한 직업

이 글을 읽으면서 데이브 샤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가 반응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래 영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란다. 앞서 언급한 넷플릭스의  'Sticks & Stones'에 나온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샤펠은 사람이 다른 젠더의 몸에 태어난 건 이해하는데, 그게 코믹한 상황인 것도 사실 아니냐며, "내가 사실 중국인인데 흑인의 몸으로 태어난 것과 비슷하다"면서 중국인 흉내를 낸다. 그런데 그 모습은 같은 동아시아인으로서 보기에 거슬리는 게 사실이고, 무엇보다 중국인 흉내를 내는 샤펠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는 관객이 과연 코미디를 보며 웃는 것인지 아니면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웃는 것인지 의심해보게 된다. 아닌가?

결국 샤펠의 것과 같은 코미디는 반드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기분만 상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농담을 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각자 자신만의 답을 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이런 코미디는 앞으로 누군가에게는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미디언이 위험한 농담을 멈추지는 않을 거다. 코미디언은 원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고, 위험을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앞서 언급한 코미디언 빌 버의 말(아래 영상)이다. 흑인 아내와 인종과 관련한 문제에 의견이 달라서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언성이 높아지던 중에 자신이 던진 농담으로 화가 난 아내가 잠깐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저는 거기에서 멈췄어야 했어요. 하지만 저는 코미디언이잖아요? '오, 웃음을 끌어냈어. 더 큰 웃음을 노려야지. 계속하자'" 이렇게 농담의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 아내에게 쌍욕을 먹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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