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범죄가 되었을까? ②
• 댓글 남기기해서웨이는 도합 78개 단어로 이뤄진 이 조약은 "세계가 전쟁을 처음으로 불법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로티우스를 비롯해 정복 전쟁을 정당화한 옛 모델을 분명하게 거부한 것이다. 전쟁을 불법화했다는 것은 새로운 영토처럼 국가가 전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리품–적어도 그것이 영토일 경우–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샤피로는 "무력의 사용만 금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합법적 결과물과 이익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자신들의 주장과 페이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모았다. 정복 전쟁은 이에 반대하는 규범이 만들어진 후에 감소했다. 해서웨이와 샤피로, 그리고 예일 대학교의 연구조교들이 함께 완성한 데이터베이스는 1819년부터 2014년까지의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정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토 변화의 사례" 254개가 있다. 이들 중에는 완전한 "국가의 소멸"도 있고, 경쟁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은 경우도 있다.
1816년부터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체결된 1928년까지 한 나라가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잃을 가능성은 약 1.33%였고, 잃게 된 영토는 약 29만 5천 평방 킬로미터(대략 애리조나주의 면적. 남한 면적의 약 3배에 해당–옮긴이)였다. 조약 체결 후 첫 20년 동안(1928~1948년)은 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상황은 조금 더 나빠지는 듯했다.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잃을 확률은 평균 1.8%였고, 평균적으로 잃은 영토의 넓이는 24만 1천 평방 킬로미터였다. 이 넓이는 애리조나주 면적보다는 줄어서 미시건주 정도에 해당하지만 상황이 좋아졌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어난 정복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것이고 대부분 원상회복이 되었다.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이 사실이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1948년부터 2014년 사이에 모든 것이 변했다. 한 국가가 한 해에 영토를 빼앗길 확률은 1.33%에서 0.17%로 떨어졌다. 달리 표현하면 정복당할 확률은 87% 이상 감소한 것이다. 그리고 정복당한 평균 영토의 면적은 1만 4,950 평방 킬로미터로 (강원도 보다 조금 작다–옮긴이) 코네티컷주 면적 정도로 줄었다.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28년 이전만 해도 평균적으로 한 국가는 한 사람의 생애 동안 한 번의 침략을 경험할 확률을 갖고 있었지만, 1948년 이후에는 한 국가가 침략을 경험할 확률은 생애에 한 번에서 1천 년에 한두 번 확률로 줄어들었다."
이는 극적인 변화다. 해서웨이와 샤피로, 페이잘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정복을 반대하는 국제적인 규범이 확립된 것을 그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존재한다. 핵무기의 등장과 강대국들 사이의 핵 억제는 그들 사이의 전면전을 어렵게 만들었고, 정복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 식민지화(decolonization) 프로세스도 의심할 바 없이 정복률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 경우 오히려 정복을 증가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인도나 인도네시아처럼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에서는 새로 그어지는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영토를 빼앗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규범 자체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이후의 비 정복 규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위와 같은 희망적인 이야기의 기반을 무너뜨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위반 사항이 발생했다는 것이 규범의 존재 기반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에 반대하는 규범을 갖고 있는데, 테드 번디(Ted Bundy, 미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범–옮긴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 규범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테드 번디가 체포되어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살인에 대한 규범은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그리고 해서웨이와 샤피로는 서구가 러시아의 침공에 압도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야말로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이 전통적으로 강화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한다. 북한의 남한 침략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 이후 영토를 원상 복귀시키는 국제연합(UN)의 노력에서 볼 수 있듯 (규범의) 강화가 때로는 군사적인 대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에 대한 대응을 "경찰 활동"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국제기구가 무력을 동원해 국제법을 집행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례에서는, 특히 거부권(veto)을 가진 5개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러시아도 포함된다–이 관련된 경우에는, 그런 개입이 불가능하다. 소련은 유엔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동유럽의 많은 지역을 사실상 점령(quasi-conquer)할 수 있었고, 유엔이 힘을 합쳐 소련의 위반을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위반 사항에 대해서는 처벌이 (국제사회에서) "추방(outcasting)"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경제 제재나 그 밖의 수단을 사용해 규범을 위반한 국가들로 하여금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정복을 허용하지 않는 규범과 (국제사회의) 제재는 이런 규범의 등장했을 때부터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웨이에 따르면 "제재라는 수단은 이 시기에 켈로그-브리앙 조약을 집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전에도 제재는 존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이 전쟁 중인 국가들을 상대로 제재를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오는 상품들을 제재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두 나라 사이에 전쟁 상태를 설정하는 것이고, 이는 중립성이라는 규범을 위반하게 된다. 제재가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전쟁의 연속이 아닌, 전쟁의 대안으로서 특정 규범들을 강요할 수 있게 개념화된 것은 켈로그-브리앙 조약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코넬 대학교의 역사학자인 니콜러스 멀더가 제재의 역사를 이야기한 'The Economic Weapon (경제적 무기)' 역시 켈로그-브리앙 조약과 국제연맹규약이 제재의 등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이 조약에 서명했을 뿐 아니라 국제연맹의 회원국이었던 일본이 1931년에 만주 공화국(중국에 속해있었고, 중국 역시 조약 서명국이자 연맹 가입국이었다)을 침공하자 세계의 지도자들에게는 정복을 금하는 규범을 일본에 강요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없었는데, 오래지 않아 '추방'이 국가들이 선호하는 대응책으로 떠올랐다. 헨리 스팀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은 그런 식으로 얻어진 (일본의) 새로운 영토를 인정하지 않는다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강조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제재에 반대했지만 니콜러스 버틀러 콜럼비아 대학교 총장 같은 유명한 인사들은 자연스러운 강제 장치로서의 제재를 제안했다. 멀더는 몇 년 후인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점령을 시도하자 "대부분의 주권국들은 사상 최초로 연합하여 다자간 경제 제재 방법에 찬성했다"라고 한다.
정복을 종식하는 것은 물론 숭고한 목표이지만, 우리가 정복 전쟁을 대신하기 위해 사용해온 방법이 과연 좋은지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페이잘은 정복에 반대하는 규범이 정착되어왔다는 증거는 그 규범 때문에 나라들이 다른 해로운 행동을 한다는 문맥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페이잘은 "1945년 이후로 외국에 의한 지도자(정권) 교체가 증가해왔다"라고 한다. 가령 1978년에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끌어내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례나, 2003년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생각해보라. "폭력에 의한 국가 소멸이라는 선택지를 없애버리니 나라들은 다른 수단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페이잘에 따르면 비 정복 원칙의 자연스런 결과로 증가하게 된 또 다른 방식이 분리주의(secessionism)이다.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갖는 가치가 증가했다. 이웃나라에 정복당할 걱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대학교의 보아즈 앳질리 같은 학자들은 비 정복 규범이 콩고 민주 공화국(이웃한 콩고 공화국과 별개의 국가–옮긴이)과 같은 곳에서 국가의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국가들이 등장하고 역량을 계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있는데, 외부의 침략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 경우 국가는 약해지고 내부 분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당연하다.
또한 비 정복 규범을 집행하는 데 사용되는 "경제적인 무기"는 일종의 집단적 처벌의 형태를 하게 될 경우가 흔한데, 이는 다른 맥락에서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현재 러시아를 대상으로 한 제재는 러시아의 중앙은행의 기능을 제한함으로써 경제 불황과 대규모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샤피로의 표현을 빌자면, "금융의 수소폭탄"에 해당한다.
만약 국제사회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의 민간인들을 폭격했다면 이는 의심할 바 없는 전쟁범죄가 될 것이다. 강제로 경제 불황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은 (물리적 폭격 수준의) 도덕적 침해는 아닐지 몰라도 무혈(無血)한 방법과는 거리가 멀고, 집단적 처벌과 유사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 비 정복 규범을 정말로 반드시 강요해야 도덕적인 행동 방침일 수 있고, 훗날 수백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재와 관련한 사람들이라면 러시아 국민들이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해서는 최소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난 일주일을 지나면서 비 정복 규범이 엄청난 영향력과 열심을 가진 집행관들(제재를 집행하는 나라들–옮긴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국제질서가 아직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규범을 위반한 나라에 용납할 수 없는 처벌을 내리지 않고도 (국제) 질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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