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사라진 마을
• 댓글 2개 보기뉴욕타임즈에서 테크 관련 기사를 쓰는 일라이 탠(Eli Tan) 기자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그가 오크데일(Oakdale)이라는 작은 도시—인구 2만 명을 조금 넘는 오크데일은 도시라고는 해도 한국 기준으로는 면 규모를 간신히 넘고, 읍이라고 해도 가장 작은 읍에 해당한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24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알게 된 후였다. 오크데일은 2020년에 바이든을 지지했다가 2024년에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타운들 중 하나였다. 바이든은 2020년 오크데일이 속한 스타니슬로스(Stanislaus) 카운티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2024년에는 트럼프가 11%라는 넉넉한 차이로 승리했다. 그런 지역에서 주민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이 글은 그가 쓴 뉴욕타임즈 기사와 이를 소개한 오디오 인트로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원문과 오디오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크데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동차로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기자는 그곳에 처음 도착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서부 시대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공기에서는 꽃 내음이 퍼지고, 과수원이 널려있고, 마을 경계 밖에서는 말 떼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오크데일을 "카우보이의 수도"라고 자랑하고, 카우보이 뮤지엄도 두 개 있었다. (참고로, 미국에는 카우보이의 수도를 자처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오크데일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은 'House of Beef'라는 스테이크 하우스였고, 식당 밖에는 픽업트럭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탠 기자는 마을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가 특이한 장면을 봤다. 그런 가게에서는 기다리는 손님들이 보라고 TV를 틀어놓곤 하는데, 흔히 보는 CNN이나 폭스뉴스가 아니라, 온라인 매체인 럼블(Rumble)을 틀어놓고 있었다. (럼블은 유튜브와 거의 같은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지만, 우익 인플루언서, 스트리머들이 대부분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 플랫폼이 만들어진 것이 유튜브에서 가짜 뉴스를 억제하는 게 우익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것이라고 반발한 사람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중국계 자본이 운영하는 우익 신문인 에포크타임즈(The Epoch Times)가 놓여있었다. 기자가 주인에게 물었더니 "예전에는 CNN과 폭스뉴스를 봤는데, 이제는 다른 데서 뉴스를 본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시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파룬궁(法輪功) 단체가 시작한 이 신문은 미국 도시에서 무가지로 배포되다가 지금은 유료 구독자를 늘려가고 있다고 한다. 반중국적인 견해와 함께 기후 위기를 부정하고, 2020년 선거 결과를 왜곡하는 등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 퍼지는 허위 정보도 쉽게 볼 수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이 매체를 신뢰할 수 없는 출처로 분류한다.
국내 정치 기사를 쓰기 위해 오크데일에 간 기자는 취재의 방향이 정치에서 미디어로 바뀌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오크데일 사람들의 미디어 소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과거에는 오크데일 사람들은 바로 근처에 있는 도시 모데스토(Modesto, 오크데일 인구의 10배)에서 발행하는 유력한 지역 신문 모데스토비(Modesto Bee)를 구독했다. 이 신문은 기자가 100명이 넘는 중견 뉴스 매체로, 그 지역의 뉴스를 커버했지만, 지금은 규모가 크게 줄어 기자 10여 명이 일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만 종이신문을 발행하고, 매일의 기사는 온라인에서 제공한다. (미국에서 지역 신문들이 사실상 멸종 위기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신문은 잘 버티고 있는 축에 속한다.) 그 외에도 마을 뉴스만 취재하는 작은 신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문을 닫았다.
이렇게 지역을 취재하는 뉴스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들을 '뉴스 사막(news desert)'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거주지 근처에 신선한 식재료를 파는 곳이 사라져 가공식품에 의존해야 하는 지역이 증가하는 현상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식품 사막(food desert)'이라는 표현을 뉴스에 적용한 개념이다.
탠 기자는 취재를 위해 마을 사람 80명과 대화를 나눴지만, 그중에서 (지역지와 전국지를 포함해) 뉴스 매체를 구독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이 마을 사람들은 어디에서 지역 소식을 들을까?
그는 오크데일에서 페이스북 그룹 'All Things Oakdale, CA'를 운영하는 줄리 로건(Julie Logan)이라는 이름의 주민을 만났다. 2015년에 시작된 이 페이스북 그룹은 지역 학교나 교통 관련한 생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곤 했지만,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주민들이 외출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룹이 변하기 시작했단다.

먼저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 인구 2만 명 도시의 페이스북 그룹의 가입자가 1만 7천 명을 넘었다. 그러면서 마을 소식이 아닌 뉴스 포스팅이 늘어났고, 허위 정보와 정치 뉴스가 등장했다. 그리고 주민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룹을 만든 로건은 이 모든 상황을 관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2020년 5월, 미국에서는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목을 눌러 사망하게 한 사건으로 BLM(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전국에 확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의 확산으로 미국의 극우, 인종주의 세력의 반발도 함께 커졌고, 그들이 퍼뜨린 온갖 가짜 뉴스가 보수층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가짜 뉴스가 오크데일의 페이스북 그룹에 들어온 것이다.
내용은 진보적인 도시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BLM 시위대가 버스를 타고 오크데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곳 시위대가 존재도 알지 못하는 작은 마을에 찾아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극우 중에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아이들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신다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믿는 이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퍼진 말을 믿은 사람들은 자신의 총을 들고 민병대를 조직해서 시내에 결집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로 도착하는 시위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마을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믿은 건 아니었고, (논란이 된 페이스북 그룹을 만든) 줄리 로건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가짜 뉴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로건은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에게 공개되어있던 페이스북을 회원만 들어올 수 있는 비공개로 전환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포스팅하는 내용을 팩트 체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로건의 노력은 역효과를 냈다. 자기가 포스팅한 글이 가짜 뉴스라는 이유로 삭제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분노한 것이다. 이들은 로건이 만든 그룹(All Things Oakdale, CA)에서 나가서 자기들만의 그룹을 만들었다. Oakdale Incident Feed First Amendment Approved (오크데일 사건 피드, 발언의 자유권 보장), Oakdale Incident Feed UNFILTERED (오크데일 사건 피드, 필터링 없음) 같은 이름의 그룹들이다.
이렇게 생겨난 그룹은 줄리 로건의 그룹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런 파생 그룹에서도 필터링이 있다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곳을 다시 나와 Oakdale Incident Feed DOUBLE UNFILTERED (오크데일 사건 피드, 필터링 전혀 없음)라는 이름의 파생 그룹을 만들었다. 미국의 미디어 환경에서 벌어지는—폭스뉴스를 보던 사람이 브라이트바트를 찾고, 더욱 심한 극우 인플루언서를 찾아 토끼굴로 들어가는—일의 완벽한 축소판이다.
주류 매체를 믿지 못하겠다며 구독을 끊은 마을 주민들이 가짜 뉴스를 팩트체크 없이 보도하는 파룬궁의 에포크타임즈를 돈을 내고 구독하시 시작한 것도 결국 그들이 극우 소셜미디어에서 보고 듣는 내용에 부합하는 거의 유일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오크데일의 유권자들은 가짜 뉴스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2020년에 바이든을 선출했던 사람들이 2024년에 이르면 압도적인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던 거다. 이와 거의 똑같은 일이 미국 전역, 특히 오크데일과 같은 농촌 지역의 뉴스 사막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2024년의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탠 기자에 따르면 오크데일에도 극우 매체, 소셜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제대로 된 매체에서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오크데일과 같은 미국의 많은 뉴스 사막에서 거의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공영방송(NPR, PBS)이 "좌파의 선전 도구"라며 이들에 대한 정부 지원을 완전히 끊기로 했다. 미국 공영라디오(NPR)의 경우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부 지원이 계속 줄어들어 이제는 전체 예산의 1% 미만에 불과한 상황이라, 정부의 지원이 사라진다고 뉴스 생산이 중단될 염려는 없다. 문제는 지역 방송국의 생존이다.
미국의 공영방송은 지역 방송국이 NPR, PBS 같은 콘텐츠 공급자에게서 프로그램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이들 개별 방송국은 그 지역 주민의 기부금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대도시의 공영방송국은 많은 기부금으로 상대적으로 살림이 넉넉한 반면, 농촌의 경우 정부의 지원금이 아주 중요하다. (대도시는 진보 유권자, 농촌은 보수 유권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격차는 더 커진다.) 트럼프의 공영방송 지원 중단은 이미 뉴스 사막이 된 농촌 지역의 유권자들의 소셜미디어 의존을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주류 언론을 억압하는 동시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만으로 구성된 백악관 브리핑을 따로 진행하는 것은 미국 전역에 수없이 존재하는 오크데일 같은 마을들에 대한 정보 통제 시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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