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김수형 기자의 '워싱턴 특파원의 기록: 수하일 샤힌 ①'에서 이어집니다.


수하일 샤힌 취재하는데 도움 준 피란민들

2021년 9월 7일 화상 인터뷰에 나타난 탈레반 대변인공항에서 아프간 피란민 취재를 마치고 리포트까지 한 뒤,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수하일 샤힌 대변인의 연락처를 알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처를 받아뒀던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봤더니 이들은 확실히 탈레반과 접촉하는 루트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명이 현지 지인들에게 받았다며 연락처를 전해줬다. 하지만 이 번호가 수하일 샤힌의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대서양에 편지 담은 와인 병을 띄워 보내는 심정으로 접촉을 시작했다. 일부는 틀린 번호로 확인이 됐지만, 번호 한 개가 이상할 정도로 답이 없었다. 휴대폰과 SNS 메시지에 뜨는 모든 수단으로 연락을 했는데, 아프간인들이 많이 쓴다는 왓츠앱은 메시지를 읽기는 하고, 답은 안 주고 있었다. 딱히 반응도 없이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나가버렸다.

시간 날 때마다 계속 메시지를 보냈더니 어느 날 벼락같이 "연락 줘서 고맙다. 인터뷰 할 수 있는 일정을 주겠다"고 답변이 왔다. 하지만 사실 그게 샤힌이라고 100%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인터뷰는 음성 통화나 이메일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화상에 등장하고 내 눈과 귀로 확인해 수하일 샤힌이라는 확신이 들 때만 방송을 한다고 나름 기준을 정했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고, 그냥 본인이 답을 줄 수 있을 때 메시지를 보내주는 상황이어서 더 답답했다. 인터뷰 시간을 몇 번 잡기는 했지만, 그때도 실제 성사되지 못했다. 이렇게 인터뷰가 몇 번 불발되면서 이번 인터뷰는 헛심만 쓰고 성사되지 못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2시간 내에 인터뷰 가능할지 확인해주겠다"고 또 답이 돌아왔다. 약간의 오기도 생기고, 이 번호 주인의 얼굴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스탠바이 하고 있으니 준비되면 연락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더니 "15분 뒤에 하자"고 최종 통보를 받았다. 이미 그 시간 카타르 도하는 자정에 가까운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줌 링크를 미리 보내줬는데, 미국 취재원들처럼 샤힌은 그걸 사용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화면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는데 생김새와 목소리 모두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인터뷰에서 봤던 탈레반 대변인 수하일 샤힌이 정확히 맞았다. 탁자에 탈레반 국기가 있고, 외신들을 상대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다른 매체 인터뷰도 많았지만, 내부 회의와 대표부 회의까지 너무 많은 일정이 있어서 당신 인터뷰 일정을 확정할 수가 없었다"고 멋쩍게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내각 구성을 앞두고 탈레반이 내부 권력 다툼으로 극도의 혼란 상태이었는데, 도하에 있는 샤힌도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듯했다.

"우리는 절대로 북한에 무기 팔지 않는다…재건의 역사 가진 한국 도움 절실"

사실 샤힌에게 어떤 것을 질문하겠다고 언질을 준 게 전혀 없었다. 한국과 관련한 탈레반 정부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다는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시간 정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질문 자체는 사전에 논의할 겨를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뭘 물어볼 거냐고 사전에 묻지도 않았다. 서방 언론에 워낙 미디어 트레이닝을 많이 한 사람이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말실수 가능성에 대해서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걸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관심 가질 내용 가운데 그동안 서구 언론에 나오지 않은 탈레반의 입장은 한국과 북한에 대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자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미군이 남기고 떠난 천문학적인 수의 무기에 대한 질문은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국방장관에게 공개편지를 보내, 아프간에 남겨진 미군 무기가 중국, 북한 등 적대 국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 거냐고 질의를 한 바 있다. 이 의혹 제기를 샤힌 대변인에게 그대로 물어봤는데, 답변이 명확했다. 미국 의원들의 주장은 그저 근거 없는 추정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무기는 아프간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북한에 절대로 무기를 팔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북한과 어떤 관계인지, 탈레반 정부 구성 이후에 북한과 접촉했는지도 물어봤다. 샤힌 대변인은 자신이 아는 한 탈레반은 북한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답했다.

아프간 개발에 한국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대놓고 말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잿더미가 된 아프간처럼 한국도 전쟁으로 파괴된 역사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도 국가 재건을 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한국이 도움을 준다면 환영하고 감사할 것이라 말했다. 경제재건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원한다는 것이냐고 다시 확인해보니, 그럼 왜 마다하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은 아프간에서 대사관을 철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자신들이 대사관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이미 발표했다면서, 이미 아프간 사업가들이 한국에서 직물, 자동차 등을 들여오면서 경제적으로도 가까웠다는 점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한국으로 출국을 원하는 아프간인도 적법한 서류를 가지고 있다면 허락하겠다는 것도 확인해줬다. 샤힌 대변인은 나가는 것도 자유지만 들어오는 것도 자유라는 걸 강조하려고 했다. 왕래가 자유롭게 되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탈레반 정부는 정상 국가라는 걸 강조하면서 나온 발언으로 이해됐다.

샤힌 대변인은 경제적인 위기를 털어놓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프간 국민의 70% 넘게 빈곤상태에 있으며, 중앙은행인 아프간 은행 자금이 동결돼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앞으로 댐, 철도 등을 건설하는 대규모 사업이 필요한데, 다른 나라와 손잡고 진행할 거라는 계획을 말했다. 다른 나라의 도움과 경제 개발 참여를 요구하는 취지의 인터뷰는 다른 나라 매체와 할 때도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한 바 있다. 수중에 돈이 거의 없는 탈레반 정부는 고난의 행군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저기 해외 자금을 어떻게든 유치해 살길을 찾아보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던 대목이었다.

故 윤장호 하사·샘물교회 파랍 살해…사과할 생각은

우리 입장에서는 탈레반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있다. 지난 2007년 탈레반의 폭탄 테러로 숨진 故 윤장호 하사와 피랍 살해된 샘물 교회 선교단에 대해서 탈레반의 입장 표명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탈레반의 테러리스트 이미지는 충격적인 당시 사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샤힌 대변인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사과할 생각 있냐고 대놓고 물어봤다. 가장 예민한 문제여서 답변을 안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곤란한 질문은 화를 내거나 화상 인터뷰를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거의 가장 마지막에 했다.

하지만 샤힌 대변인은 목소리 톤도 바뀌지 않을 정도로 감정의 동요 없이, 상황 논리를 들며 설명을 했다. 당시 아프간은 점령 상태였고, 한국도 점령군의 일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일은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샤힌은 당시 아프간 국민 수십만 명도 점령군에 살해당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빠져나갔다. 점령당했던 아프간은 점령군 일원이었던 한국보다 더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 했다. 샤힌 대변인은 한국과 관련된 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세부 사항은 잘 모른다고 말하면서, 과거 탈레반이 행한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양국 관계를 설명하면서 한국과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기를 원한다는 것도 귀에 들어왔던 부분이었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한국과 맺을 준비가 돼 있다면서 상호 이익과 존경에 기반을 둔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샤힌은 우리가 알던 탈레반이라기보다는 노련한 외교관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하일 샤힌의 말로 탈레반의 전모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정상 국가의 모습으로 아프간의 지배세력이 되려는 영리해진 탈레반의 모습이 샤힌을 통해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이 있고, 집권 이후에도 탈레반 지배 체제의 여러 문제점들이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탈레반이 과거처럼 철권 폭압 정치로는 더 이상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갖게 된 건 분명했다.

아프간 전체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탈레반이 우리 정부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한국과 북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한 것은 취재 기자로 보람 있는 일이었다. 특히 K팝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아프간계 인사들이 큰 도움을 줬고, 그게 수하일 샤힌 대변인과 접촉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건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현장 취재를 하는 '뻗치기'는 고달프지만 그 과정은 일종의 탐험이고 결국 그 경험이 더 큰 취재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수형 기자의 '워싱턴 특파원의 기록'은 다음 주말에 이어집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